📑 목차

1. 동의보감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말, 기혈순환
동의보감을 처음 펼쳐보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기(氣)’와 ‘혈(血)’입니다.
허준은 질병을 설명할 때, 혹은 치료의 원리를 말할 때
거의 예외 없이 기와 혈의 흐름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기혈이 막히면 병이 되고,
기혈이 통하면 병이 낫는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이보다 더 현실적인 건강 기준이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허준이 기혈순환을 이야기할 때 **특정 질병 이름보다 ‘상태’**를 더 중요하게 봤다는 점입니다.
어디가 아픈지보다
왜 그 부위에 문제가 생겼는지,
몸 전체의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막혀 있는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이 관점은 현대의학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지금에 와서 더 설득력을 갖는 부분도 많습니다.
2. 기(氣)는 무엇이고, 혈(血)은 무엇이었을까
기혈순환을 이해하려면
먼저 ‘기’와 ‘혈’을 따로 나눠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혈은 비교적 이해가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혈액과 상당 부분 겹칩니다.
피는
영양을 운반하고
노폐물을 실어 나르며
몸의 각 기관을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기’입니다.
기라는 말은 너무 넓게 쓰여서
막연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허준이 말한 기는
신비한 에너지라기보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기능적 힘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힘
-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게 만드는 힘
- 위장이 음식물을 아래로 밀어내는 힘
- 근육이 수축하고 이완되는 힘
- 뇌에서 명령이 전달되는 힘
이 모든 것이 동의보감에서는 ‘기’의 작용으로 묶입니다.
즉, 혈이 재료라면, 기는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입니다.
허준은
“기가 앞서가고 혈이 뒤따른다”고 표현했는데,
이 말은 지금으로 치면
“기능이 먼저 무너지면, 구조도 결국 무너진다”
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3. 기혈순환이 막힌다는 말의 진짜 의미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기혈이 막혔다’는 표현은
단순히 혈관이 막힌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상태를 포함합니다.
- 몸은 멀쩡한데 늘 피곤한 상태
-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는데 여기저기 불편한 상태
- 특정 부위가 차갑거나 묵직한 상태
- 이유 없이 답답하고 숨이 얕아지는 상태
허준은 이런 상태를
‘아직 병은 아니지만, 병으로 가는 길목’으로 보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 부분이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현대의학에서도
검사 수치가 정상인데 불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자주 듣는 말이
“스트레스성입니다”
“기능적인 문제입니다”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기능적인 문제’가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기혈순환 이상과 상당 부분 겹칩니다.
혈액 검사나 영상 검사로는 잡히지 않지만,
몸 전체의 흐름이 어딘가 어긋난 상태.
허준은 이를
‘기와 혈이 제 길을 가지 못하는 상태’라고 표현했습니다.
4. 현대의학으로 다시 풀어보는 기혈순환
그렇다면
기혈순환을 지금 기준으로 다시 번역해보면
어떤 개념에 가까울까요.
완전히 일대일로 대응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겹칩니다.
첫째, 혈액순환과 미세순환입니다.
단순히 큰 혈관이 막히는 문제가 아니라
말초혈관, 모세혈관 단위에서
영양과 산소가 제대로 전달되는지의 문제입니다.
손발이 차거나
어깨, 목이 늘 뻐근한 상태는
이 미세순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자율신경계의 균형입니다.
자율신경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심장 박동, 소화, 호흡을 조절합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몸은 늘 긴장 상태가 됩니다.
이때 나타나는 증상들이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기체(氣滯)’와 유사합니다.
셋째, 근육과 근막의 긴장입니다.
몸이 한쪽으로 굳거나
특정 부위만 반복해서 아픈 경우,
혈관 자체보다
근육과 근막의 경직이 원인인 경우도 많습니다.
허준은 이를
‘기운이 막혀서 혈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꽤 정확한 관찰입니다.
5. 허준이 기혈순환을 생활과 연결한 이유
동의보감을 읽다 보면
약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활 습관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 너무 과하게 먹지 말 것
- 오래 앉아만 있지 말 것
- 분노와 걱정을 오래 품지 말 것
- 밤을 새우지 말 것
이 모든 조언의 중심에는
기혈순환이 있습니다.
허준은
몸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원인을
외부의 병균보다
일상 속의 흐트러진 흐름에서 찾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 말이 더 와닿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아도
늘 피곤하고
늘 소화가 불편하고
늘 어딘가 뻐근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병은 아니지만
건강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태.
허준이 말한 기혈순환은
바로 이 경계선을 관리하는 개념이었습니다.
6. 기혈순환이 잘 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렇다면
기혈순환이 잘 된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분들이
“혈액순환이 잘 되면 손발이 따뜻한 것 아니냐”고 떠올리지만,
허준이 말한 기혈순환은 그보다 조금 더 넓은 개념입니다.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과하게 무겁지 않은 상태
- 식사를 하고 나서 더부룩함이나 졸림이 오래 이어지지 않는 상태
- 이유 없이 여기저기 쑤시거나 묵직한 통증이 반복되지 않는 상태
- 작은 일에도 감정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상태
이 모든 것은
몸의 특정 수치가 좋아서라기보다
몸 전체의 리듬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허준은
기혈순환이 잘 된 몸을
“억지로 관리하지 않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상태”로 보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말하면
최적의 컨디션이라기보다는
일상을 무리 없이 살아낼 수 있는 기본 상태에 해당합니다.
기혈순환이란
무언가를 더 보충해야 완성되는 개념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기능들이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의보감에서는
강한 자극이나 즉각적인 변화보다
지속 가능한 균형과 흐름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7. 지금 우리가 기혈순환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현대의학은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있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정확한 검사 수치,
영상 장비,
약물과 수술까지
명확한 병이 있을 때의 대응은 매우 강력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병과 병 사이,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설명이 부족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 병은 아닙니다.”
“조금 더 지켜보시죠.”
이 말 사이에 놓인 불편함은
환자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혈순환이라는 개념은
의외로 현실적인 역할을 합니다.
기혈순환은
질병을 진단하는 도구라기보다
몸 상태를 해석하는 언어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검사 결과로 설명되지 않는 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긴장감,
반복되는 불편함을
‘흐름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
허준이 말한 기혈순환은
몸을 부품처럼 나누기보다
하나의 연결된 시스템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생활 방식과 환경을 고려하면,
이 관점은 오히려
현대에 더 필요한 시선일지도 모릅니다.
8. 마무리하며
허준이 강조한 기혈순환은
결코 막연하거나 신비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몸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기준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확한 진단과 빠른 치료를 기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몸의 작은 변화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줄어들었습니다.
피곤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불편함을 참고 넘기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몸의 흐름은 서서히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기혈순환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몸을 바라보는 기준을
하나 더 갖자는 제안에 가깝습니다.
숫자와 결과 이전에
지금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어디에서 막히고 있는지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일.
동의보감은
지금도 그 질문을 조용히 남겨두고 있습니다.
“당신의 몸은
지금,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습니까?”